“깨어나시는 즉시 청제에게 기별을 넣게.” “예. 한데 정말 괜찮으신 걸까요? 벌써 사흘을 넘겼습니다. 설마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못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예끼, 이놈아. 그런 재수 없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거라. 말이 씨가 된다는 것도 모르느냐?” “하오나 폐하, 왕유릉타가 진맥하기론 이틀이면 깨어날 거라고 했습니다! 한데 오늘로 나흘째가 아닙니까...
꿈속 세상에라도 들어온 것처럼 고요하고 아름다운 풍경에 정신이 팔렸던 나머지, 날 이곳까지 데려온 고양이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급히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호숫가에서 물을 할짝대고 있는 고양이가 눈에 들어왔다. 고양이에게 다가가 몸을 숙여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녀석은 기분이 좋은 듯 가르릉 소리를 냈다. 나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 세상 태평...
일단 호기롭게 뛰쳐나온 것까지는 좋았다. 아니, 호기롭게도 아닌가. 그렇다면 뭐에 쫓기는 도망자처럼 도망쳐 나온 것까지는 좋았다. 비록 찬 공기를 온 얼굴로 맞으며 나온 탓에 얼굴이 시리고 뺨이 얼얼했지만 다 좋았다 이거다. 갈 곳 없는 내 처지만 빼고. “겨울이라 그런가. 온 동네가 적막하네.” 산책이라고는 했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한술 더 떠 애...
그러고 보니 어제 내가 자라는 요녕의 말에 이기지도 못할 잠투정을 부렸던가……. 나도 참, 말은 그렇게 했으면서 결국 들어오자마자 녹초가 되어 뻗다니. 어젯밤 우리 집 세 신령님과의 밤 산책은 절대 짧게 끝나지 않았다. 분명 멀지 않은 거리에 집이 있는데 우리는 무려 삼십 분이나 죽림을 거닐었다. 처음에는 가깝게 보이는 집의 불빛만 보고 다 왔다고 생각했지...
“…… 아, 아! 그보다 슬아도 이제 어엿한 어른이구나.” 우물쭈물 눈치를 살피던 요녕이 화두를 바꿨다. 초모가 손을 턱에 대며 흠 소리를 냈다. 대화 전환 나이스, 요녕. 입 다물라고 해서 미안하다. 나는 초모의 신경이 나에게서 옮겨 갔음에 안도했다. “우리가 오래 살아서 그런가, 세상이 달라져서 그런가. 옛날 같으면 시집가서 안방마님이 돼도 이상하지 않...
우리는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그간의 회포를 풀었다. 심지어 중간에는 과자를 시식하고, 셋의 주도하에 감격의 평을 내리는 시간까지 가졌다. 물론 그토록 녹차 과자를 먹고 싶어 했던 셋만. ‘동서양의 결합을 상징하는 것과 다름없는 영광의 산물을 맛봤으니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어찌나 감격하시던지.’ 그리고 그런 셋을 보며 내가 진심으로 걱정한 건, ...
“자, 농담은 이쯤 해 두고. 슬아 너, 요즘 뭐 달라진 건 없지?” “달라진 거? 갑자기 뭐가 달라져?” “그냥 이것저것. 신력의 흐름이라든가, 이유 없이 어떤 예감 같은…… 낯선 기분이 든다든가. 그런 거.” 요녕답지 않은 걱정스러운 낯빛이었다. 덩달아 우옥과 초모의 낯도 어두워진 것 같고. 하지만 그들의 걱정이 무색하게 내 몸은 평소와 같이 멀쩡했다....
집안의 데워진 훈기가 몸을 풀어 주니, 오는 동안 차게 식어 감각이 굳어가던 손발에 조금이나마 온기가 돌았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상다리가 부러져라 차려진 저녁을 먹고, 큰 통유리 창 안쪽에 덧대어진 창호 발린 장지문의 고리를 당겨 밖을 살폈다. 어둑해진 정원 군데군데에 내려앉은 석등 불빛이 꽤 고즈넉하고 영롱했다. 배도 부르고 등도 뜨뜻한 것이 이대로 누워...
“잠깐이나마 떠올랐던 근심이 먼 과거 얘기처럼 느껴질 정도니.” 나는 막 닫은 방문에 몸을 기댄 채 턱을 매만졌다. 그러고 보니 분명 며칠 전 아빠와 엄마는 일이 있어 본가에 함께 가지 못하고 늦게나 오실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당분간은 저 실랑이를 못 보겠구나. 덤으로 오빠도 해야 할 일이 있어 부모님 오실 때 같이 온다고 했으니 한동안은……. ...
세상에는 신비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데 정작 이 세상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건 단순히 그런 일이 흔치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지나치게 의심이 많은 인간의 사고방식 탓이기도 하다. 인간이라면 백이면 백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상황을 맞닥뜨린 뒤에는 말 그대로 ‘보고도 믿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
‘이십 구, 삼십. 다 숨었니―’ ‘다 숨었다!’ ‘뭐야, 또 슬아만 남았어? 걘 잘 숨으니까 그냥 다 같이 찾자.’ ‘슬아야, 슬아야!’ ‘찾았어?’ ‘아니……. 나 그만 찾을래. 못 찾겠어!’ ‘근데 슬아는 어떻게 한 번을 안 들키지?’ ‘그러니까! 매일 우리만 술래야.’ ‘봐봐, 지금도 우린 다 술래야.’ ‘야, 계속 슬아만 남으니까 재미없다. 우리 ...
그것은 먼 옛날의 일. 까마득히 먼 옛날에 구름을 다루는 신, 운사 육약비(陸若飛)와 궁희(穹姬)라는 천녀가 서로를 깊이 은애해 백년가약을 맺고자 했다. 그 사랑이 어찌나 절절한지 운사의 연정은 가히 지상의 망망대해를 뒤덮을 만했고, 궁희천녀의 연정은 깊고 깊어 땅끝을 넘고 지하를 넘어도 꽁지조차 아니 닿을 성싶었다. 지척서 눈길이 맞물리면 삼사월 봄볕을 ...
심중의 무릉도원, 그곳의 취생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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